*할페티(Halfeti): 흑장미 품종
- 죽음, 이별, 원한, 증오, 당신은 영원히 나의 것
#1
현자: 오늘은 멜리아에 대한 걸 기록해야겠지. 솔직히 조금 무서워서 대화가 이어질지 모르겠지만... 오늘도 방에 있으려나.
브래들리: 여어, 현자. 멜리아에게 볼 일이 있는 거냐?
현자: 브래들리. 네, 방에 있나요?
브래들리: 아-아. 그래. 나참, 네로 녀석. 밥 먹으러 안 오는 건방진 녀석 줄 밥까지 챙기고 말이지.
브래들리: 너도 조심해라.
그렇게 말한 브래들리는 나를 지나갔다. 멜리아의 방 앞에 서자 바로 물건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와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현자:... 괜찮겠지?
문을 똑똑 두드리자 들려오던 소리가 멈추고 조용해진다.
현자: 멜리아? 방에 있다면 잠깐 시간을 내줄 수 있나요?
대답이 없다. 잠시 기다리다 다시 문을 두드려봐야 하나 싶어서 한 번 더 문을 두드리려고 손을 올릴 때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멜리아의 방은 고풍스러운 장식들로 꾸며져 있었으나 바닥에는 거울로 추정되는 깨진 것과 액세서리들이 흐트러져 있었다. 정말 이 안에 들어가도 괜찮은 걸까....... 다른 마법사들은 마법으로 정리하던데 그렇다면 방금 깨진 거겠지. 앤티크 테이블 위에는 레몬파이가 올려져 있다.
멜리아: 조금이라면 들어줄 수 있어. 모처럼 기분이 좋거든.
다행이다...! 네로, 감사해요! 속으로 네로에게 감사를 올렸다. 멜리아가 테이블을 가운데에 두고 의자에 앉으며 레몬파이를 포크로 찍었다. 동시에 맞은편의 의자가 여기 앉으라는 듯이 당겨진다. 조심조심 바닥의 물건들을 피해 걸어 들어가고 있으니까 갑자기 몸이 둥실 떠올라 탄성을 내질렀다.
현자: 우왓...!
멜리아: 시끄러워. 이 정도로 호들갑 떨지 마. 네가 밟으면 내 물건이 망가질 것 같으니까 옮겨줄게. 감격했어? 후후, 솔직하게 대답해도 괜찮아.
부드럽게 허공에 떠서 의자에 앉혀지고 테이블 앞까지 끌어당겨지며 손에는 찻잔이 쥐어졌다. 마법을 직접 느끼는 순간마다 신기해서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를 전했다.
현자: 멋져요!
#2
멜리아: 당연하지. 그렇게 솔직하게 말해오는 너 같은 아이, 마음에 들어.
여기가 멜리아의 방...
> 인테리어가 멋지네요.
멜리아: 좋은 눈을 가지고 있네. 그렇게 안 봤는데.
현자: 좋은 건가요...?
멜리아: 하? 칭찬해주고 있잖아. 당신 역시 바보야?
> 화분이 많네요.
멜리아: 내 취미야. 식물을 좋아한다면 하나 선물해 줄게. 뭘로 클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재밌을 걸.
현자: 와아, 예쁜 꽃이라면 받고 싶어요.
> 걸려있는 지팡이가 멋져요.
멜리아: 내가 쓰는 거니까 당연히 최고급품이거든. 하나하나 다른 세공이 있어. 그렇게 쳐다봐도 구경시켜주지 않을 거야.
멜리아: 내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어. 이런 좁은 방에서 지내려니 불편하다고. 옷을 둘 장소도 부족하잖아.
현자: 그러고 보니 멜리아가 입지 않을 것 같은 옷들이 보이네요. 조금 작은 옷들도 있고...
멜리아: 내가 어렸을 때 입었던 옷이야. 불태울까 생각했지만 그러지 않았어. 왜일까?
현자: 네? 제게 물어보셔도... 그 옷이 소중했던 거 아닐까요? 어렸을 때면 추억이 담겨 있을 것 같아요.
멜리아: 괜히 물어봤어. 그럴 리가 없잖아.
현자: 그렇군요. 그렇다면 어째서 지금까지 가지고 있나요?
멜리아: 하? 모르니까 당신한테 물었던 거잖아. 바보야?
나는 괜히 물어봤다고 생각하며 화제를 돌렸다. 다른 마법사들에게 질문을 하며 현자의 서를 적고 있다는 것을 간단히 설명했다.
#3
현자: 저기, 그래서 오늘은 멜리아에 대해 질문하고 싶어요.
멜리아: 대답해도 좋은 질문이라면.
현자: 감사합니다... 그럼 우선 간단하게 자기소개 좀 해주실 수 있나요?
멜리아: 멜리아. 북쪽의 마법사고 200년 넘게 살았어. 북쪽에 있는 저택에서 식물을 관리하며 지내고 있었는데 하아, 내가 왜 이런 곳에서 현자의 마법사 같은 거나 해야 되는지.
현자: 식물이라면 어떤 종류인가요?
멜리아: 북쪽이니까 식물을 키우기 어렵거든. 내가 원하는 것만 키울 수는 없지. 금방 죽기도 하고. 그러니까 마물을 잡아먹으며 자랄 수 있는 아름다운 생물을 기르는 거야. 가끔 인간을 먹기도 하지만. 후후, 당신도 귀여운 아이들의 밥으로 줄까?
현자:... 사양할게요. 기르는 걸 좋아하나요?
멜리아: 내가 원하는 대로 키울 수 있으니까 좋아해. 그런데 어째서인지 다들 금방 죽어 버렸어. 내가 기껏 사랑해 줬는데 쉽게 죽다니 건방져. 당신은 내게 길러지고 싶지 않아? 귀여워해줄게.
멜리아는 가느다랗고 긴 손을 뻗어 내 머리카락을 훑고 지나갔다. 나도 모르게 침을 삼키고 고개를 저었다. 금방 죽이는 마녀에게 키워지는 건 사양이지만 귀여워해 준다는 건 궁금해질 정도로... 무섭다.
멜리아: 그래? 나도 너같이 건방진 아이는 키울 마음 없었으니까. 흥.
조금 기분이 상한 것 같은데 설마 내가 거절해서 그런 건 아니겠지.
현자: 그러고 보니 멜리아의 손목에 있는 흉터는 어쩌다 생긴 건가요?
멜리아: 너, 좋은 질문 했어. 들려줄게. 이 손은 내 손이 아니야.
#4
자신의 손이 아니라니, 혹시 오웬과 카인처럼 신체를 교환한 경우일까. 생각하며 멜리아를 응시했더니 내 생각을 눈치챘다는 듯이 낮게 웃는다. 포크를 나의 눈알을 향해 일직선으로 뻗어왔다.
멜리아: 하하!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 내가 그런 한심한 짓을 할 것 같아? 이건 말이지. 그래, 전리품이야. 내가 승리했다는 증거지.
현자: 누구와 싸운 건가요?
멜리아: 응. 그 사람... 하! 얼굴이 떠올라서 모처럼 좋았던 기분이 최악이 됐잖아. 나를 키운 마녀야.
멜리아를 키운 마녀라니 대체 어떤 사람일까. 멜리아는 열받았는지 눈썹을 올리며 포크로 거칠게 레몬파이를 찍어 입 안에 넣어 오물거렸다. 차를 한 모금 마시니 조금 기분이 풀렸는지 이어서 말해준다.
멜리아: 나를 마나석으로 만들어서 먹으려고 키운 거야. 그래서 내가 죽였어. 나를 죽이려고 했으니까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었거든. 부모 같은 사람을 죽인 날은 도저히, 잊을 수 있는 게 아니지. 너, 나를 동정해 줄래? 불쌍하다는 눈을 하면서 나라면 당신을 그렇게 취급하지 않겠다고 말해줄래...?
현자: 그런, 말은 할 수 없어요. 멜리아는 불쌍한 사람이 아니니까요. 부모같은 사람을 죽였어야만 했던 멜리아의 마음을 헤아릴 수는 없이 아팠겠죠... 이런 대답이라서 죄송해요.
멜리아: 흥, 안 넘어오네. 거짓말이야. 부모같은 사람이라고 내가 생각했겠어? 처음부터 난 그 여자가 죽도록 싫었어. 증오했어. 늘 죽이고 싶었지. 그래서 마침내 죽였을 때, 내 손을 잘라간 그 사람의 손을 내가 빼앗았을 때. 얼마나 행복했는지! 그 행복이 남아있어서 내가 여기에 있는 것도 참아주는 거야. 그 사람이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었지.
「진작에 죽일 걸 그랬어.... 너란 아이는 정말이지,... 후후. 마지막까지 즐겁게 해 줄래?」
대답에 나는 가볍게 충격을 받았다. 멜리아는 북쪽의 마법사. 당연한데 왜 방심하고 솔직하게 믿었을까. 아까의 손길과 손에 들린 따스한 찻잔이 나를 다정하게 대해준 것 같아서겠지. 키운 사람이라면 스승 같은 존재였을텐데. 멜리아는 행복하다고 말하지만 눈빛에는 진득한 감정이 남아있었다. 마법사의 인생은 길다. 긴 시간 동안 함께한 사람을 죽이거나 죽임 당해야만 하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5
현자: 그, 그럼 다음 질문으로 넘어갈게요. 멜리아가 좋아하는 건 뭐죠?
멜리아: 알아서 뭐 하려고? 약점으로 생각할 거야? 아니면, 나를 유혹?
현자: 둘 다 아니에요. 대답하고 싶지 않다면 안 해도 괜찮지만 멜리아에 대해 알고 싶을 뿐이에요.
멜리아: 아, 그래. 레몬파이는 좋아해. 아직은 이 정도만 대답해 줄게. 나에 대해 알고 싶으면 좀 더 분발해 봐.
싱긋 웃는 얼굴로 내 입에 레몬파이를 들이민다. 입을 벌려 먹으니 상큼한 레몬 커드의 맛과 달콤한 머랭의 맛이 조화롭게 퍼져 기분이 좋아졌다. 아차! 정신을 차려야 되는데!
현자: 싫어하는 것도 알려줄 수 있나요?
멜리아: 그 사람. 그리고 약한 인간.
현자: 그, 좀 더, 알려주세요.
멜리아: 너도 현자라면 알고 있겠지. 츠바키라는 여자. 그 여자가 싫어.
츠바키, 그 현자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멜리아를 만나게 된 계기도 츠바키라는 이전 현자님이었다. 츠바키는 지금 눈앞에 있는 마녀와 똑같이 생긴 현자로 이미 죽은 사람이다. 그녀가 남긴 현자의 서를 읽었을 때 나는 감동받았었다. 모두의 좋은 부분을 적어줬고, 주의할 부분이나 임무들에 대해 세세하게 기록해 줘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림도 잘 그려서 많은 마법사들의 초상화와 자화상을 남겼지. 그녀가 죽은 지 몇백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음유시인은 츠바키라는 현자님의 대한 얘기를 노래하고 아이들은 동화로 알고 있다. 마법사들은 그 이름을 꺼내지 않지만 나와 같이 이방인이었던 그녀는 이 세계에 죽어서도 존재하고 있었다.
멜리아: 다들 나를 통해 그 여자를 봐. 내가 모르는 사람이 나를 알고 있어. 최악의 기분이야. 멋대로 나를 다정한 사람일 거라 착각하고 무언가 기대하지. 하, 난 북쪽의 마녀 멜리아야. 착각하지 말라고 소리치고 싶어 져. 이미 죽은 사람을 찾아가서 죽일 수도 없어. 그래. 너도 지금 날 그런 눈으로 보고 있네.
그럼에도 넌 지금 내 눈을 응시하고 무서워하잖아? 나를 봐달라는 말은 내게 어울리지 않지. 너처럼 그저 내 방문을 두드리는 거에도 긴장감이 필요한 존재. 그게 나야.
현자: 긴장하고 있다는 거 알았어요?
멜리아: 어리석은 도둑도 알아챈 것을 내가 모를까.
어리석은 도둑이라면 분명 브래들리를 칭하는 말일 것이다. 대화를 듣고 있었구나. 그러고 보니 깨지는 소리가 났었지. 나는 바닥에 흔적으로 남은 거울의 잔해로 눈을 돌렸다. 사방을 비추는 거울에 내가 담겼다.
#6
현자: 멜리아의 마도구는 케인소드죠. 보여줄 수 있을까요?
멜리아: 특별히.
허공에서 손을 올린 멜리아의 손바닥 위로 케인 소드가 나타났다. 검은색의 세련된 몸체에 위로는 손잡이에 동백꽃 모양의 금세공이 있어 아름답게 빛났다.
현자: 아름다워요! 검날을 보여줄 수도 있나요?
나의 말에 검을 빼고 순간 빠르게 검날이 멜리아의 손바닥을 베어냈다. 검날 위로 멜리아의 피가 방울지며 떨어지는데 신기하게도 아래로 떨어지지 않고 마치 스며들듯이 검이 피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멜리아: 네 피를 머금게 하는 것도 괜찮겠는걸. 이 소드의 꽃문양 봤지? 처음에는 봉오리 형태였어. 수많은 마법사와 생명체를 죽이고 이렇게 피워냈어. 사실은 내가 직접 만들고 싶었지만 어려워서 동쪽의 마법사에게 그 사람이 의뢰한 거야.
꽃은 활짝 펴있었다. 그렇다면 얼마나 많이 죽인 걸까 라는 생각에 약간 섬뜩해졌다.
멜리아: 그 사람이 내게 마물을 던져놓거나 식물을 던지고 가면 난 죽이거나 키워야 했어. 처음에는 그저 괴롭히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걸 만들기 위한 재료가 될 줄은... 제멋대로인 사람이지? 최악이야.
그래서 이 소드에는 그 사람의 피도 한가득 스며들게 했어. 정말로, 마음에 드는 물건이야.
현자: 그렇군요.
어느 질문을 해도 무서운 대답만 나오니까 뭘 질문하기가 두려워. 그래도 질문은 어느 정도 끝났다. 시간이 꽤 흘렀는지 레몬 파이가 있던 접시는 깨끗하게 비었고 차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7
멜리아: 갈 거야?
어째서 쓸쓸한 것처럼 물어보는 걸까.
현자: 아, 네.... 이제 곧 저녁 시간이니까 식당에 가려고요. 멜리아도 함께 가실래요?
멜리아:... 하? 누구한테 묻는 거야? 내가 그런 천박한 마법사들 사이에 껴서 먹을 리가 없잖아. 멍청한 질문 좀 하지 마.
나는 바로 후회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방을 나가려고 했다. 인사를 하기 위해 방문 앞까지 와서 뒤를 돌아보니 갑자기 이 안에 들어갈 때의 일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그때는 발 디딜 곳을 찾기 어려웠는데, 지금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깨진 거울의 잔해도 사라져 있다. 혹시, 내가 들어올 거라는 걸 알고 일부러...?
멜리아: 바보. 얼른 가버려.
현자: 멜리아, 다음에 또 올게요. 그때는 걸어서 들어갈 수 있게 해 주세요.
멜리아는 대답이 없었다. 다만 방 안에 놓여있던 작은 화분을 손가락으로 조종하듯이 휘릭 움직이더니 내 손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거칠게 쾅 소리를 내며 방문이 닫혔다. 멜리아가 준 선물을 손에 꼭 쥐었다. 어떤 식물이 자라날까 기대를 품으면서.
식당에 가자 다른 마법사들이 저녁을 위해 모여 있었다. 멜리아에 대해 물어보자.
네로: 오, 현자 씨! 마침 잘 왔어. 배고프지? 그런데 그 화분은 뭐야?
현자: 멜리아가 선물해 줬어요.
네로: 그 아가씨가 선물을? 나는 매번 레몬파이를 줘도 아무것도 못 받았는데.... 하하, 농담이야. 귀여움 받고 있나 보네.
네로: 멜리아에 대해서 알고 싶다고? 나도 아는 건 별로 없어. 어쩌다 보니까 레몬 파이를 주고 있지만 그 아가씨는 방 밖으로는 잘 안 나오고 식당에도 늦은 시간에나 오니까 말이지. 안다고 해봤자 식성 정도려나. 뭐 동쪽의 요리사에게는 딱 맞는 관계잖아?
현자: 그런가요. 그럼 멜리아와 같은 얼굴을 한 현자님은요?
내 질문에 네로의 얼굴이 굳었다. 혹시나 말실수를 한 걸까 싶었는데 네로는 금방 얼굴을 풀고 다정함을 담아 대답한다. 네로의 눈은 아주 예전 일을 더듬어 가듯이, 황금빛 눈동자가 잠시 바래진 듯 보였다.
네로: 츠바키도 레몬 파이를 좋아했어. 재밌지? 사실 아가씨를 보면 자연스럽게 츠바키가 생각나지. 그래서 내 얼굴을 볼 때마다 싫다는 표정을 짓는 걸지도.
브래들리: 어이, 네로. 너 뭘 그렇게 얘기하고 있는 거냐.
네로: 멋대로 나타나서 대화를 방해하지 마.
현자: 그게, 멜리아와 츠바키 씨에 대해 물어보고 있었어요. 브래들리도 말해줄 수 있나요?
#8
브래들리는 인상을 확 찌푸리더니 네로가 준비해 둔 후라이드 치킨을 입에 넣어 뜯었다. 잠시 후 술을 들이켜고 평소의 호탕하게 웃는 얼굴로 변해 대답한다.
브래들리: 그 녀석 말이지. 멜리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지만 츠바키는 잘 알아. 대부분의 이전 현자에 대해서는 기억이 안 남아있지만 그 녀석은 기억하지 않아도 되잖아? 그렇게나 흔적을 남기고 갔으니 기억하기 싫어도 알게 되겠지. 세상 사람들에게는 다정한 현자로 남겠지. 그런데 난 그때도 츠바키라면 북쪽이 어울리겠다고 생각했거든. 하하! 북쪽의 마녀로 나타났을 때도 놀랍지 않았어.
현자: 브래들리는 멜리아와 츠바키 씨가 동일 인물이라고 생각하나요?
브래들리: 생각할 것도 없이 츠바키를 아는 마법사라면 모두 그렇게 느낄 거야.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고 본인은 아니라고 떽떽거리지만 그런 것까지도 츠바키야.
네로: 어이, 브래들리. 말을 조심해.
브래들리: 아앙? 네로, 네 녀석은 모르고 있어. 츠바키는 본성을 죽을 때까지 숨기고 있었던 여자야.
네로: 그런 의미가 아니야. 그리고 내가 너보다 더 잘 알고 있어. 죽기 전에 나를 찾아와서 대화한 적이 있어. 그때 잘못된 길을 고른다면 도와줄 수 있냐는 말을 들었지.... 그때, 난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했어. 내가 해주는 음식이라면 살 희망이 생긴다고 다정하게 말해줬는데...
브래들리: 그랬었냐. 그럼 주의해야겠군. 츠바키와 가까웠던 너를 위협하려 들 거야. 같은 존재지만 달라. 그건, 그 얼굴을 하고 있어도 북쪽의 마녀다.
네로: 설교하지 않아도 알고 있어.
브래들리는 네로의 신변을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네로가 성실하게 멜리아에게 레몬 파이를 갖다 주는 이유가 그런 거였구나. 다정한 말을 하는 멜리아를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게 마음에 없는 말을 한다는 점이 멜리아의 무서운 부분이었으니까. 츠바키 씨도 본심은 그렇지 않은데 다정하게 말한 걸까.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마법사들이 가진 마음을 쉽게 배신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아. 그런 건 너무 현자의 마법사들에게 잔인한 일이니까....
#9
식당에서 나와 산책을 위해 정원을 걸었다. 멀리서 달 아래에 날고 있는 마법사가 눈에 들어왔다. 달빛에 은은하게 빛나는 금빛 머리카락이 흔들리고 있었다. 멜리아가 뒤를 돌아봐 그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순식간에 거리가 줄어들었다. 코가 닿을 거리에서 눈을 마주치고 눈을 접어 웃는다. 물에 젖은 장미의 향기가 훅 풍겨왔다.
멜리아: 내가 보고 싶었어?
현자: 오늘 낮에도 봤잖아요. 산책을 하고 있었어요. 그래도 멜리아를 마주쳐서 좋아요.
멜리아: 그래? 난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받아서 짜증 나. 그러니까 이만 꺼져.
현자: 싫어요. 이곳은 멜리아만의 공간이 아니니까요.
멜리아: 헤에. 그래? 그렇다면 강제로 방에 처넣어주지.
읏, 잠깐. 너...! 얼른 꺼져!
갑자기 곤혹스러운 일을 당한 것처럼 멜리아는 여유롭던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리고 바닥에 내려와 내 손을 잡아온다. 무서운 일을 당하는 걸까 싶어서 긴장했는데 표정과 다르게 손길은 무척이나 다정했다. 천천히 연인에게 하듯이 깍지를 끼고 양손을 올린다. 춤을 출 것 같은 자세로. 그러고 보니 멜리아의 상처는 가끔 손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거였지. 그리고 이 손은 멜리아를 키운 마녀의 손이었다.
멜리아: 아아, 짜증 나! 너 말이지. 그렇게 웃지 마! 뭐가 우스운 거야? 최악이라고!
현자: 푸흣, 아하하! 그렇지만, 멜리아. 이렇게나 다정하게 손을 잡고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우리 움직이고 있어요. 당신의 손이 절 리드해 주는데 멜리아는 그렇게 화난 얼굴을 하고 있잖아요.
손이 멋대로 움직이면서 그 손에 맞춰 넘어지지 않기 위해 자연스럽게 발도 움직였다. 멜리아는 나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대꾸하기 싫다는 의미겠지.
현자: 멜리아, 난 츠바키라는 현자에 대해서는 몰라요. 분명 그녀가 남기고 간 것들은 많지만 내 눈앞에 있는 건 멜리아죠. 화분을 준 것도 멜리아가 처음이에요. 이방인인 제가 이 세계의 식물에게 물을 주고 키울 수 있다는 건 멋진 일이겠죠. 고마워요.
멜리아: 식인 식물로 자라서 널 죽일지도 모르거든?
현자: 지켜줄 마법사들이 있으니까 괜찮아요. 츠바키가 남긴 기록들보다 매일 물을 주고 돌봐야 하는 식물이 멜리아를 생각나게 만들겠죠.
#10
고개를 돌리고 있어서 난 멜리아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그렇지만 잡힌 손에 힘이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아까의 부드러운 손과는 다른 움직임. 상처에서 원래대로 돌아온 게 아닐까.
멜리아: 그런 말을 들으면 내가 기뻐할 것 같아? 절대로 아니거든!
현자: 기쁘라고 말한 게 아니니까 괜찮아요. 그냥 제 생각을 말하고 싶었어요. 제가 멜리아에 대해 알고 싶듯이 멜리아도 저에 대해 알아주면 좋겠거든요.
멜리아: 하아? 어째서 내가 알아야 하는데!
현자: 그러게요. 멜리아는 손을 이렇게 잡아주는구나 라는 걸 알아버렸으니까 그렇겠죠?
멜리아:... 뭐? 너...!!!!!!
아, 나를 똑바로 보는 멜리아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눈동자의 색깔처럼 물든 얼굴이 밤하늘 아래에서도 선명하게 보였다. 이 마녀, 부끄러워하고 있어. 또다시 웃음이 터져 나오자 점점 더 붉어지더니 손이 빠지고 멜리아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밤하늘의 달과 멜리아는 무섭도록 잘 어울렸다. 나약한 것들을 일부러 키우고 죽여버리는 마녀는 내 손을 잡을 때 힘을 빼준다. 내가 금방 죽을 연약한 존재로 본다. 그런 마녀에게 강한 자신을 보여주고 싶었다. 쉽게 죽지 않으니까 그렇게 쳐다보지 않아도 괜찮다고.
현자: 멜리아, 다음에는 내 방에 놀러 와주세요.
멜리아:... 무릎 꿇고 부탁한다면 생각해 볼게.
현자: 레몬파이를 준비할게요. 그리고 또 어떤 디저트를 좋아하는지 함께 알아가 봐요.
당신이 준 식물도 보러 와주세요. 죽이지 않고 열심히 키울게요.
멜리아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흔들리는 금실 같은 머리카락에 얼굴이 가려진다.
멜리아가 손으로 머리카락을 넘기자, 어쩔 줄 몰라하는 아이 같은 얼굴이 드러났다.
멜리아: 그거, 죽인다면 내가 너를 죽일 거야. 그러니까 그렇게 되지 않게 친히 감시해 줄게.
현자: 멜리아! 고마워요!
멜리아는 금세 멀어져 갔다. 나를 두고 가는 뒷모습을 보고 나도 뒤를 돌았다.
돌아가야지. 돌아가서 화분에게 이름을 붙이고 물을 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