雪 景
눈이 많이 내리는 어느 혼마루의 이야기
푸석한 머리카락이 눈을 찔러와도 자를 생각은 들지 않았다. 붕대가 감긴 손으로 머리를 가볍게 흐트러트리고 아침을 알리는 목소리에 밖으로 나섰다. 나만을 위해 준비된 아침상이 문 앞에 놓여있어 그것을 가져와 입 안에 음식물을 천천히 밀어 넣는다. 씹지 않아도 잘 넘어가게 만들어진 죽과 입맛을 돋우는 산뜻한 찬거리는 아픈 사람도 침을 꼴깍 삼킬 것처럼 보기 좋았지만 저에게만은 그렇지 않았다. 흙을 씹는 것처럼 오랜 시간 입 안에서 천천히 머무르다 물과 함께 겨우 삼킨다. 보기 싫은 꼴이라는 걸 알아서 그들과 같이 밥을 안 먹은 지도 오래였다.
살기 싫어하면서도 살기 위해 꾸역꾸역 음식을 비우면 대기하고 있던 근시가 익숙하게 상을 치운다. 근시는 늘 그릇이 비워져 있으면 불충하게도 주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말라고 잔소리를 해도 습관이 들었다며 웃는 꼴이 징글맞아 몇 번 주먹으로 때리면 그제야 내일은 안 하겠다며 항복 선언을 해온다. 어제도 그 말을 했으면서 내일도 내가 넘어갈 거라고 생각하는 얼굴이 열받았다.
"꺼지라고 하기 전에 그 얼굴 치워."
나의 근시는 날카로운 말에도 뭐가 좋은지 웃으며 대답했다.
"좀 더 다정하게 대해주면 좋을텐데. 나중에 후회할지도 몰라?"
"주인인 내가?"
"나뿐만이 아니야. 다른 아이들에게도 잘 대해줘. 난 온 지 얼마 안 됐어도 계속 릿쨩 곁에 있으니까 릿쨩이 어떤 주인인지 알지만 다른 아이들은 아니라서 걱정되거든."
걱정된다는 말에 눈썹이 삐죽 올라갔다. 무엇에 심기가 불편해진건지 눈치챘다는 듯이 웃는 얼굴로 손가락으로 올라간 눈썹을 문질러온다.
"내가 걱정하는 건 리츠야."
무슨 말을 하는건지. 당연한 말에 고개를 돌리고 대답을 피하니 나의 근시, 고케는 말을 이어나갔다.
"아참, 원정 부대가 돌아왔어."
"그 얘기를 가장 먼저 했어야지. 다들 상태는?"
"조금 지친 것말고는 아무 이상 없어. 릿쨩은 마음이 약하니까 무리는 안 시키잖아."
"마음이 약한 게 아니야."
그 뒤에 이어지는 말을 하려했는데 고케가 먼저 선수를 치며 내 입을 가로막았다.
"그래그래, 마음이 약한 게 아니라 리츠가 피를 보는 게 싫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 짜증이 나서 못 참겠다는 이유지? 알고 있으니까."
어이도 없고 할 말도 없어서 뻔뻔한 낯짝을 쳐다보다 일어섰다. 아침부터 짜증 나게 한 벌로 고케에게 말 당번을 시키고 나서 천천히 혼마루를 살필 예정이었다. 혼마루는 별채 2개와 본채 1개로 내가 지내는 곳은 별채 중 하나였다. 그 바로 옆에 위치한 별채에는 수리실과 야겐의 방이 존재한다.
아무도 없는 수리실을 먼저 보고 그 다음으로 야겐의 방에 들어갔다. 소리가 빼앗긴 듯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네가 없는 시간을 기록하듯이 쌓인 먼지를 훔쳤다. 다른 누군가가 대신 관리하게 두는 건 어쩐지 싫은 기분이라 내가 청소를 한다고 했는데 이렇게 금방 먼지가 쌓이는구나. 돌아온다면 또 잔소리를 듣게 될까.
먼지를 닦아낸 후 구석에 있는 낡은 쇼기판으로 손을 옮겼다. 그날의 대국을 복기하듯이 천천히 기물을 옮길수록 더럽게도 머리가 아팠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 속으로 매번 스스로 떨어져 내려간다. 잊으면 안 된다는 듯이, 살아야만 했다. 무력한 자신을 높은 존재들이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신님들을 보기가 그렇게나 싫은 걸까. 그래도 이곳에서 나를 기다리는 너만은 달랐는데, 이제는 내가 기다리고 있어.
처음 사니와직을 맡게 됐을 때를 복기하며 올려뒀던 기물을 내려놓는다.
11월 27일
겨울의 그날은 첫눈이 내리던 날이었다.
사쿠라코지 리츠는 잊혀가던 프로 기사로 어린 시절에는 천재라는 타이틀로 대중매체에서 인기를 얻었으나 이후 좀처럼 승단을 못해 자연스럽게 사람들에게서 잊혀지게 됐다.
좀처럼 승단을 하지 못하고 정체되어있던 나에게 중요한 날이기도 했다. 당시의 기억은 눈에 온통 가려진 듯 흐리게 보이기만 했다. 그날 옮겼던 대국의 수를 전부 기억하지만 그 이외의 세상은 눈과 같이 흩날리는 것처럼...
경기의 승패는 알 수 없이 중단됐다. 부모님이 죽었다는 소식, 그리고 눈을 깜빡이니 대국을 위해 입었던 정장은 상복이 되어 있었다.
아직 무슨 수를 놓아야 하는지 생각도 못했는데 모든 일이 나를 제외하고 빠르게 흘러갔다. 그날 내린 첫 눈은 아직까지 멈추지 않고 있다. 나의 스노우돔에서 지금도 천천히 내려오는 눈이 코끝에 닿았다. 야겐과 카슈를 현현시키고 당연히 그들을 기물로 여겼다. 인간의 껍데기를 쓰고 있는 그들에게도 감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부서진다면 얼마든지 대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쇼기판 옆에 놓인 나무상자를 꺼내 열었다. 깨진 검날 조각이 하나. 야겐의 파편이 존재했다.
또다시 흐려지는 기억. 외면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아. 눈앞에서 나를 지키고 사라진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수행을 떠난 야겐이 어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린다. 어째서 야겐이 가는 것을 허락했을까. 야겐에게만은 약하다는 걸 야겐도 잘 알고 있으면서. 이제는 네가 날 지킬 필요가 없는데 어째서 떠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