쿄우야 란마
쿄우야 집안은 그 주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부잣집이다. 그만큼 유명하지만 그와 모순적이게도 그 누구도 그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이 집안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하나 믿기 힘든 배경을 우선 알아야 했다. 그건 바로 실제로 요괴가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요괴가 존재한다면 물리치는 퇴마사도 존재한다는 것.
쿄우야 집안은 퇴마를 업으로 삼는 가문으로 일반인과 다르게 요괴를 볼 수 있는 눈과 능력이 핏줄을 통해 내려왔다. 도쿄의 밤을 지키는 이들은 현대사회에서도 그 유지를 이으며 살아오고 있었다. 현 쿄우야 집안의 가주는 뜻밖에도 연애 결혼을 이뤘다. 당연히도 집안 내에서 반발이 심했고 이를 억누르기 위해서라도 그들은 후계를 낳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모체에 아기는 쉬이 들어서지 않았고 부부는 결국 입양을 결심하게 된다. 이렇게 어느 소년은 쿄우야 란마라는 이름을 받게 된다.
란마가 선택된 이유는 사랑이나 성격 준수한 외모따위가 아닌 퇴마의 재능이었다.
쿄우야라는 성을 달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그에 맞는 퇴마 능력이 있어줘야 했다. 보통의 일반인은 요괴의 존재를 모르고 살아가기 때문에 이를 억지로 깨우치게 하기 위해서 쿄우야 가문의 비전이 하나 있었다. 인공적으로 만든 눈을 이식하는 것. 생눈을 뜯어내 인공눈을 달고 살아야했다. 눈을 받으면 요괴를 볼 수 있게 된다. 그렇다고 이 인공눈은 모든 인간이 이식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격이 있는 자만이 인공눈의 선택을 받았으며 기묘하게도 의지가 있는 눈에게 간섭받고 쉼없이 시험을 받아야만 했다.
란마라는 이름을 받아들인 소년은 눈치가 빨랐다. 어른에게 사랑받는 6살을 꾸며내고 있는 아이로 자신을 감추고 연기하는 것에 능숙했다. 그렇기에 고아원에서도 많은 예쁨을 받았다. 어른들은 모두 그를 칭찬했으며 사랑받는 게 당연한 아이라고 했다. 하지만 선뜻 란마를 입양하겠다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너무나도 사랑받을만한 아이라서 기이했던 것이다. 설명할 수 없는 꺼림칙한 감각, 아이답지 않아서 자신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드는 아이. 사람들은 란마에게 잘해줬지만 가까이 두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란마는 언제나 외로움을 앓아야만 했다.
그래서 원래 가지고 있던 심해같이 깊은 눈이 후벼파지는 고통을 참을 수 있었다. 언제나 사랑받기 위해서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려고 했던 그가 선택을 받게 된 순간이었으니까 그까짓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부부는 란마를 친가족으로 받아들이고 대해줬다. 사랑받는 게 당연한 아이, 그런 성격을 꾸며낼 수 있었으니까 눈치 빠르게 집안을 파악하고 애교있게 굴었다. 사용인들은 그를 멋대로 동정했으며 또 존경했다. 부부는 아이에게 죄책감을 가졌기에 더욱 아낌없는 사랑을 주었다. 그런 사랑을 원하는 게 아니었는데. 가족이라기보다는 집안의 후계자 취급에 가까웠다.
불만이 있는 건 아니었고 오히려 감사했다.
하지만 란마는 태어난 이후로 줄곧 맨몸으로 폭풍을 맞고있던 아이였기에, 그 안에 자리잡은 구멍을 채울 수는 없었다. 뿌리없는 메마른 나뭇가지를 땅에 꽂는다고 성장할 수는 없다. 단단한 흙이 나뭇가지가 쓰러지지 않게 받쳐줄 수는 있지만 그게 전부였다.
후계 교육을 받은지 1년이 됐을 즈음에 어머니께서 임신을 하셨다. 당연히 축하하고 동생이 생겨서 기쁘다는 의사를 전했다. 그때 나와 놀아주던 방계 아이가 불안하지 않냐고 물어왔었는데 솔직히 전혀 불안하지 않았다. 그만큼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고 있었고 동생이 생긴다는 건 새로운 가족을 의미하니까 당연히 기뻤다. 그 아이가 말한 불안함은 내 후계자 위치를 두고 한 말이겠지. 그런 귀찮기만한 자리에 미련은 없었다. 그저 내 쓸모가 후계자였으니 받아들이고 있었을 뿐, 만약 새로 태어날 아이가 정식 후계자가 된다고 해도 괜찮았다.
이제와서 그 아이가 후계자로 교체된다고 해도 부부는 나를 버리지 못할테니까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시간이 흘러 동생이 태어나고 작은 생명을 처음 봤을 때 내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아니, 생각만이 아니라 나를 이루는 모든 게 뒤흔들렸다.
츠바키, 쿄우야 츠바키. 천사같이 곱슬거리는 금색 머리를 하고 가문의 누구보다 진한 분홍색 눈을 가지고 태어난 여자아이. 내 하나뿐인 여동생이 작은 손가락으로 나의 약지를 쥔다. 보드라운 살결에 담긴 미약한 힘은 마치 중력처럼 작용해서 손에서 떼어낼 수가 없었다.
츠바키는 란마라는 나뭇가지를 붙잡은 연약한 뿌리였다.
마당에 심은 꽃나무가 자라는 것과 같이 아이들도 빠르게 성장했다. 츠바키는 말을 구사할 수 있게 되기 전부터 제 오라버니인 란마를 잘따랐는데 말을 또렷하게 할 수 있게 되니 하루종일 란마만 찾게 됐다. 남매는 보는 사람이 저도 모르게 얼굴에 웃음이 퍼지게 될 정도로 사이가 좋았다. 남매는 언제나 같이 다녔고 그러니 후계 교육도 같이 듣게 됐다. 사실 후계자에 대해서는 츠바키가 태어난 이후에도 란마가 맡기로 되어 있었다. 집안 내외에서 말이 많았지만 부부의 생각이 완고했기에 누구도 대놓고 반발할 수는 없었다.
물론 란마에게는 재능이 있었고 교육을 잘 따라와서 작은 반발은 금방 가라앉았다. 그러나 츠바키가 자랄수록 문제가 됐는데 츠바키의 재능이 너무 뛰어났던 탓이다. 초대 가주만큼이나 재능이 있다는 평가를 받은 츠바키를 후계자로 삼아야 한다는 말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대해 정작 란마는 큰 관심이 없었는데 란마는 츠바키가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고, 츠바키는 그런 것보다는 란마와 노는게 우선인 어린아이였다.
피로 이어지는 능력이기에 가문에서 후계자, 장차 가주가 될 위치가 가져올 득실을 이해하기에는 란마조차 너무 어렸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울타리 안에서 자신들을 노리는 부류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쿄우야 가의 아이는 누구나 시험을 친다. 란마또한 퇴마사로 인정받기 위해 시험을 치뤄 당당히 뛰어난 실력으로 요마를 물리쳐 단단히 자리를 잡았었다. 그리고 츠바키의 차례가 다가왔다. 원래라면 시험은 어렵지 않은, 안전한 난이도로 배운 것을 바탕으로 최하급 요괴를 퇴마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지게 된다. 가문 내에서 누군가 츠바키를 노리고 장난을 친 것이다. 몇몇 사람들은 란마가 아닌 츠바키가 가주가 될 거라고 굳게 믿었다. 그렇지 않으면 입양아인 란마가 아니라 자신의 자식은 왜 후계자가 되지 못하는지라는생각이 들었으니까. 츠바키를 죽이거나 없앨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그녀가 시험을 치르지 못하고 이후 요괴에 대한 강한 두려움으로 가주 자리를 포기하게 할 생각이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외부인인 란마가 아니라 자신의 자식을 가주 자리에 올릴 수 있으리. 헛된 욕망에서 비롯한 계획이었다.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하기 위해 당연히 시험 자리에는 어른들이 함께했다. 그 어른들이 전부 장난질을 계획한 이와 한 편이라는 문제가 있었지만.
시작하라는 말과 함께 츠바키가 검을 꾹 쥐었다. 자만이 아니라 자신감과 함께 요괴가 담긴 항아리의 봉인의 해주와 동시에 츠바키는 이변을 감지했다. 생각한 것보다 강한 봉인이 이미 허술하게 해주되어있던 것이다! 너덜하게 붙어있는 테이프를 살짝 건들인 감각, 섬찟한 기운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 누구보다 뛰어난 퇴마의 재능을 물려받은 츠바키는 위험을 감지하고 소리치려 했으나 이미 늦은 후였다.
항아리에서 튀어나온 삿된 것은 눈 앞에서 바로 사라졌다. 이윽고 바다에서 기이한 것이 튀어나오더니 츠바키의 발목을 낚아채 물 안으로 끌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고작 어린아이의 능력을 판단하기 위한 요괴로는 과한 존재, 우미보즈라는 것을 눈치 챈 츠바키는 겁에 질렸고 손에 꾹 쥐고있던 칼이 힘없이 수면으로 떨어졌다.
츠바키가 기절하기까지 나서는 어른은 아무도 없었다. 란마가 다급하게 뛰어가는 동안에도 그저 알고 있었다는 듯 방관하는 태도로 무관심하게 서 있을 뿐.
결국 요괴를 제압한 건 란마로, 이 일로 인해 장난을 친 범인의 뜻과 다르게 란마는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자리잡게 된다. 본래라면 란마까지 위험에 처했을 때, 어른들이 나섰겠지.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이 란마 혼자서 해낸 것이다.
츠바키가 정신을 차린 이후 많은 게 바뀌기 시작했다. 우선 츠바키는 그 사건에 대한 충격으로 요괴를 두려워하게 됐다. 츠바키는 능력이 뛰어나 다른 사람들보다 요괴를 잘 보는 눈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평범히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었고 잠에 들 수도 없게 됐다. 잠깐이라도 눈을 감으면 어두운 물 속에 끌려들어가는 것 같았고 란마가 손을 잡아주지 않으면 멀쩡히 서있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부부는 결국 츠바키의 기억을 의식 아래 깊이 재워두자고 결정하게 된다.
이렇게 쿄우야 츠바키는 요괴와 관련한 모든 기억을 잃고 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쿄우야 츠바키
쿄우야 츠바키는 늘 집안이 답답했다. 높은 담장 안에 있는 큰 저택, 마당에는 내가 태어났을 때 심었다는 동백나무들이 보였다. 다른 사람들은 부러워할만한 돈 많은 가문의 아가씨지만 정작 츠바키는 자신의 집안이 뭐하는 곳인지 남들보다 몰랐다. 무엇보다 기억 중간중간에 비어져있는 구멍, 부모님은 그저 내가 어린 시절 죽을뻔한 위험을 겪은 이후 기억을 상실했다고 설명했다. 구멍을 메우고 싶어 어린 시절에 대해 물어도 무언가를 감추려는 듯 어색한 답변들. 그런 위험을 또 겪을까봐 두려운 것인지 이 집안은 과하게 자신을 보호하고 있었다. 좋게 말해 보호지. 통제나 다름없었다.
학교가 끝나면 집으로 곧장 돌아와야 했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정해진 길을 벗어나면 지켜보고 있었다는 듯 사용인이 나와 부드럽게 집으로 안내했다. 돌아가는 길뿐 아니라 학교 안에도 집안의 손길이 닿아 있다는 걸 깨달은 건 중학교 때 친구라고 생각한 애가 알고보니 우리 가문에서 일부러 붙인 또래였다는 걸 우연히 알게 됐을 때였다. 그 이후로는 다가오는 동급생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자연히 의심하게 됐고 대부분 그 의심은 정답이었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집이 집으로 느껴지지 않았고 그저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그런 츠바키에게 유일한 위안은 자신의 친오빠, 란마였다. 뭐가 그리 바쁜지 자주 보지는 못했지만 란마만은 나를 통제하려 들지 않았다. 오빠가 가끔 집에 돌아오는 날에는 커다란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리고는 언제나 너는 네가 하고싶은 걸 하면 된다고 말해준다.
이것도 이제 지나간 감정이지만…
란마에게 나는 동생이 맞는걸까? 고등학교에 들어가니 란마는 집에 들어오는 날이 보름에 한 번도 되지 않았다. 보고싶다는 문자를 보내면 한참 지나고 까먹었을 즈음에나 답이 돌아왔다. 란마가 없는 집의 담장은 있을 때보다 높게 느껴졌다. 집 밖에 있을 때는 다들 그렇게 날 지켜보지 못해 안달이면서 막상 집 안에 들어오면 쥐 죽은 듯 조용하다. 부모님은 바빠서 오빠와 마찬가지로 자주 뵙지 못했고 내가 사용인들에게 살갑게 다가가면 그들은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나에게서 거리를 뒀다. 마치 그래야만 한다는 듯이…….
이곳에서 얻을 수 있는 내 자유는 그림뿐이었다. 새로운 세상을 창조했고 그러면 내가 그린 세상은 오로지 내가 통제하는 남에게 억압받지 않아도 되는 장소였으니까 그게 무엇보다 소중했다. 가끔씩 상상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구체적인 기이하게 생긴 존재가 떠올랐다. 그러면 그 모습을 그림으로 표현하고는 했었는데 이게 부모님이 보시기에는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나보다. 부모님은 바빠도 내게 시간을 쓰기 위해 노력을 하는 분들이셨다.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통제랑은 별개로 사랑받는다는 걸 알아서 난 부모님이 내 그림이 어떻든 칭찬해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왜 전부 내 생각과 반대로 흘러가는건지.
부모님은 내 그림을 보자마자 눈에띄게 안좋아진 안색으로 사용인을 시켜 내가 그린 것들을 전부 가져오게 했다. 그것들을 살펴보더니 어째서 이런 걸 그렸느냐고 물었기에 솔직하게 그저 머리에 떠올랐다고 답했다. 질문에는 정답이 있었던걸까? 그들은 더이상 내가 그림을 그리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아니, 눈에 보이는 것만을 그리라고 시켰다. 이후로 그림을 그리려고 하면 누군가가 지켜보고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상하지. 분명 방에 아무도 없는데도 감시당하고 있다는 감각은 뭐라 설명할 수가 없었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머리에 떠오른 존재를 그리면 다음날 그 그림만 사라져 있거나 누군가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와 내 도움을 청했으니까.
눈에 보이는 것만 그리라니, 내 시야에 닿는 모든 것들은 당신의 통제하에 이뤄진 세계에서?
지긋지긋하다. 정해진 하루가 끝나면 또 똑같은 정해진 하루. 같은 하루의 반복에 지쳐있었다. 란마는 돌아오지 않고 오랜만에 잠깐 보면 1시간을 같이 있지 못하고 잘지내라는 말만 남기고 쉽게도 담장 밖으로 나간다. 난 저 담장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봄의 끝물, 동백꽃이 땅에 떨어져 있었다. 시들어서야 나무에 떨어지는 꽃이 썩기 전에 하나 주워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내 이름과 같은 꽃만이라도 여기서 벗어났으면 좋겠는 마음이었다. 이런다고 해서 변하는 건 없겠지만, 내 미래로 덧그릴 수 있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그런 일상에도 변화가 생긴 건 오랜만에 란마를 만난 이후였다. 변화라기에는 통제하는 대상이 다른 어른들에서 란마로 변화했을 뿐이지만. 란마에게 심통이 잔뜩 난 나는 오랜만에 본 그에게 심술을 부렸다.
내가 친동생이 맞아? 오빠라고 부르기 싫어.
그가 상처받기를 의도한 말은 내 생각보다 날카로웠나 보다. 란마는 한참을 가만히 서있다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내 머리 위로 내리는 첫눈을 부드럽게 털어냈다. 상처받기를 원했지만 이렇게 시리게 말하고 싶은 건 아니었어. 하필 첫눈이 이럴 때 내리는 건 뭐람. 란마는 그의 목도리를 풀어 내게 둘러주었다. 당연히 소중한 내 여동생이지. 누구보다도 소중해. 털어내지 않아도 눈은 녹을텐데, 그는 내가 조금이라도 차가울까봐 걱정이었는지 나를 타이르며 안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신발을 벗지도 않고 바로 또 오빠가 밖으로 나갈 거라는 걸 알아서 고개를 저었다. 비록 밖에 서서 추워서 얼어붙은 입으로 말해야 했지만 오랜만에 오빠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그날 나눈 대화에서 오빠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지 못한다. 한가지 알게 된 건 그날 이후로 집으로 갈 때 나를 따라붙던 시선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당연히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나를 찾으러 오는 사람이 있었지만 이제는 정해진 길을 벗어날 수 있게 됐으니까.
눈이 내리는 날, 정해진 길을 벗어나 이제는 얼마 남아있지 않은 어린시절 그리움에 놀이터 쪽으로 향한 날이었다. 그곳에서 츠바키는 눈처럼 하얀 소년을 만나게 된다. 웅크리고 앉아서 허공을 응시하는 눈은 갈 곳이 없어보였다. 그쪽으로 우산을 기울이자 시선이 내게 닿았다. 놀이터에는 다른 아이들도 있었는데 누구도 이 소년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그 혼자서만 세계에서 격리된 것 같아 보였다. 어쩌면, 어떤 가능성을 떠올렸는지 자신도 모르겠다. 그저 충동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나랑 같이 갈래?
끄덕이는 고개, 그리고 둘은 말없이 함께 걸었다. 남자를 데리고 본가에 가면 또 무슨 통제를 당할지 알 수 없었기에 츠바키는 발걸음을 란마의 별택으로 향했다. 란마가 잠깐 자고가는 용도로 쓰는 집이니 란마와 그 옆에 붙어다니는 비서말고는 아무도 모르겠지. 그리고 어차피 란마가 그곳에 있을 리도 없었다. 만약 본가에 돌아오지 않고 그곳에 있으면 내가 다신 얼굴도 보지 않을 거라는 걸 알겠지.
그렇게 도착한 장소는 역시나 아무도 없었고 생활의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츠바키는 이미 소년을 자신이 주운 고양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고 있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소년을 목욕하게 시키고 란마의 옷으로 갈아입혔다. 그때까지도 소년은 말없이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츠바키가 시키는대로 할 뿐이었다. 둘은 소파에 앉아 말없이 서로를 응시할 뿐이었다. 할 말이 없다거나 어색한 분위기가 아니라 마치 서로 처음보는 존재 또는 세계를 탐색하는 분위기였다. 둘은 닮아있었다. 자신의 이름을 렌이라고 말한 소년이 손을 들면 츠바키도 손을 뻗었다. 손바닥을 맞대고 서로의 온기에 맞춰나갔다.
집에서 연락이 와 오랜 시간을 함께할 수는 없었지만 짧은 시간으로도 충분했다. 렌은 츠바키가 처음 만난 벗어난 길, 그 자체. 그 존재를 친구라고 정의할 수는 없었다. 츠바키에게만은 새로운 세계의 창이자 란마의 대체재였다. 사실 렌은 란마가 츠바키를 위해 준비한 요괴였다. 요괴이기도 하지만 존재감이 옅어서 일반인을 그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하지만 츠바키는 인지할 수 있었고 란마로 츠바키에게 친구를 만들어주고 싶다는 마음에 준비한 요괴였다. 렌은 설녀가 낳은 자식인데 설녀는 남자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를 버린다. 렌은 엄마에게 버려진 자식이었고 이를 란마가 주워 자신의 아래에 둬 길들인 존재였다. 렌을 거둔 이유는 쓸모가 있어서지. 안타까움은 아니었기에 란마는 그저 렌을 이용할 때만 사용했다. 가주가 될 날이 얼마 안남은 란마의 힘은 강력해서 그런 어린 요괴를 통제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렌은 감정을 배우지 못했다. 시키면 그에 따라서 할 일을 한다. 지적 생명체라면 가진 욕구나 욕망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그랬던 렌이 츠바키를 만나 눈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천천히 감정을 익히게 된다. 란마의 생각대로 둘은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줬다.
츠바키는 자신이 원하던 그림을 할 수 있게 됐다. 렌은 란마에게 명령받은대로 란마를 모르는 척을 한 채로 츠바키에게서 란마를 소개받았다. 란마는 렌이 자신의 일을 도우면 좋겠다는 말을 츠바키에게 전하며 그러면 자신의 집에 계속 있게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대답은 당연히도 츠바키가 허락했으며 렌은 정해진 대본에 맞추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란마가 공을 들여 정교하게 세운 세계, 모형정원 안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둘은 인지하지 못했다. 인지하기에는 너무나도 넓은 울타리였기에 츠바키는 자유라는 착각을 얻었고 렌은 츠바키가 세상의 전부였다.
렌, 넌 어디에도 가면 안돼. 잠깐은 가도 괜찮지만 금방 다시 돌아와. 알겠지?
응. 돌아올 곳은 어차피 네가 있는 장소 뿐인데.
그렇지? 그러니까 오빠랑 같이 일한다고 해서 오빠 닮으면 안돼! 란마도 돌아올 곳은 여기밖에 없는데 너무 안들어온다니까.
전해줄까?
아니, 내가 몇 번을 말했는데도 소용 없었어. 네가 전했는데 돌아오면 더 짜증날 것 같으니까 괜찮아. 그리고 이제 나한테는 렌이 있잖아.
렌이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돌아오는 것은 늘 그렇듯이 작은 끄덕임이었다.
난 그런 렌을 보고도 못본 척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 알았으니까. 내게 돌아올 장소로 계속 남아달라고 하고 싶다는 것을 알면서도 외면했다. 그래야만 난 자유롭게 남아있을 수 있었으니까. 그의 차가운 뺨을 쓰다듬으며 나의 온기로 보답한다. 네가 보여준 마음들을 소중히 간직하겠지만 메어있고 싶지는 않아서.
대학생이 됐고 성인식을 치른 후 란마는 가주 자리에 올랐다. 여전히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래도 괜찮게 여겨졌다. 여전히 친구는 만들지 못했지만 그림은 그릴 수 있다. 혼자서 여행도 못가지만 렌과 함께면 갈 수 있었다.
그만큼이나 함께 했으니까, 내 세상의 창으로 삼은 렌의 세상이 나라는 것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눈치채기 싫어서 모르는 척하던 것도. 다른 사람은 안되는데 렌은 되는 이유. 어렴풋이 그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기에 네게 온전히 나를 맡길 수 없는 거야.
츠바키는 란마가 제게 자주 그랬듯이 렌을 품에 안아준다.
언젠가 내가 네 옆을 떠나도 네가 계속 따뜻하기를 원해. 이제는 손을 맞대고 서로의 체온이 맞춰지기를 기다리는 미숙한 우리가 아녔다. 사랑, 그런 순진한 단어가 아니었으니까. 우리는 서로의 욕망이었다. 오직 나는 너로, 너는 나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게 허락된 관계성.
누군가 일부러 보기좋게 묶어놓은 듯한 실같은 관계는 참으로 끊어지기 쉽겠지. 그리고 그 실은 속수무책으로 꼬이고 엉켜서 결국에는 응어리가 될 거다. 그래서 실을 풀 준비를 하는 게 아니라 나는, 자를 준비를 했다. 내 일부가 네게 계속 남아있기를. 만일 네가 혼자 남게 된다면 그때 생긴 응어리에 나도 한데 섞여서 무엇이 너고 나인지 구분할 수 없게끔 말이다.
그리고 나는…
너를 내가 놓는다면 내가 가장 바라고 바라던 진짜 자유일 거다.
나는 내가 가장 중요했으니까, 그럴 수 있는 때가 오면 아무 미련없이 놓아 버리겠지.
그러니까 나를 이루는 일부를 네게 두고 갈게.
네가 쫓아올 수 있도록 말이야.